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망명정부 (문단 편집) == 해체와 재정착 == 1980년대에 [[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]]가 소비에트 연방의 후원을 바탕으로 폴란드 인민군의 장군단을 앞세워 [[폴란드 통일노동당|폴란드 공산당]]의 당권을 빼앗으면서 군사정권을 출범했기 때문에 폴란드 망명정부가 폴란드 인민공화국를 타도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, 마지막의 선택으로 [[레흐 바웬사]]에게 베팅했으니, 쌍방의 대결은 무승부(?)로 종결했다. 1990년에 레흐 바웬사가 제3공화국을 출범시키며 [[국민투표]]를 통한 민주적 정부가 자리잡자 더 이상 존속할 명분이 없어져 [[폴란드 제2공화국|전간기의 폴란드 공화국]]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대통령기, 국새, 국장, 헌법 초안 등 법통을 바웬사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해체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. 무려 51년 동안 타국에서 유지한 법통이 이어지게 된 것. 그러나 당시 폴란드 공화국을 다스리는 수뇌부는 구 공산 정권과 [[독립자치노동조합 '연대']]가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Polish_Round_Table_Agreement|원탁회의]]를 통해 수립한 연합정부였고, 폴란드 망명정부의 정치인들은 [[정년퇴직]]의 시점에 이르렀으니, 그들이 추천하는 지식인들을 새로운 정부의 고위급 관직(장차관급 및 국과장급)에 등용하는 조건으로 모두가 정계를 은퇴했다. 망명정부의 일꾼들은[* 재정 수입이 감소하면서 정부의 규모를 축소한 덕택에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관직(대통령, 총리, 부총리, 장관, 차관, 비서관)만 공무원이고, 나머지 모두가 그냥 일꾼이다.]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폴란드에 귀국하는 사람도 있었고, 서유럽에서 거주하는 폴란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외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. 망명정부의 각료들을 위시한 고위층들은 귀국해서 특별연금을 받았지만, 귀국을 [[아예]] 거부한 채로 미국과 프랑스의 [[시민]]이나 영국과 캐나다의 [[신민]]으로 사는 것을 택한 폴란드 사람들도 많았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끝난 뒤에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 재정착한 이래로 무려 5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폴란드로 귀국하기에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가 매우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. 폴란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외채난으로 경기침체를 겪었고 특히 체제전환 과정에서 [[초인플레이션]]이 일어나고 실업률이 한때 20%대로 올라가는 등 1990년대까지도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다. 지금의 폴란드는 실업률이 많이 낮아지고 임금수준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영국에 비하면 소득수준이 크게 낮고, 많은 폴란드인들이 브렉시트 이전까지 영국으로 많이 이주해서 돈벌이를 했으니 [[의식주]]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. 게다가 폴란드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기득권을 일정부분 보장했기 때문에[*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. 심지어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조차 반러 노선을 밟을지언정 자국의 구 공산당 인사들은 포용했는데, 현실적으로 이들이 50여 년을 집권한 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,] 전국 방방곡곡에서 여전히 떵떵거리는 [[노멘클라투라|예전의 공산당원]]들에게 오랫동안 쌓인 배신감과 함께 서구와 북미에서 태어나 현지인의 정체성을 갖고 자란 2세대와 3세대 자녀들의 교육 문제를[* 3세대들의 경우엔 2021년 시점에서 나이가 20대~40대에 이르렀고, 프랑스의 [[니콜라 사르코지]]와 [[마뉘엘 발스]]처럼 오래 전에 재정착한 [[선진국]]의 [[국민]]으로 살고 있다.] 고려하여 귀국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. 한편, 폴란드 국민들 가운데 나치 독일의 손아귀를 벗어난 [[폴란드 유대인]]은 폴란드 망명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멀리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. [[수정시오니즘]] 성향이 강했던 [[폴란드 유대인]]은 전간기 폴란드로부터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직간접적 원조를 받으면서[* 전간기 폴란드는 유대인에 대해 미묘한 태도를 보였다. 폴란드는 자기 조국이 없는 유대인의 처지에 동감하면서도, 그들이 폴란드에 너무 많이 거주한다고 불편해했다. 그러므로 폴란드는 1930년대 말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Ghetto_benches|게토 벤치]]와 같은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행하면서도 유대인들의 조국을 세워 국외로 이주시키는 방안(+친폴란드적 유대국가 수립을 통한 폴란드의 해외 영향력 확대)을 추진하게 되었고, 자연스레 시오니즘을 지원하게 되었다. 자세한 내용은 [[티머시 스나이더]](Timothy Snyder)의 [[블랙 어스]]를 보라.] 폴란드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지만, 2차 대전을 계기로 전간기 폴란드가 몰락하고 런던 망명정부도 끈떨어진 신세가 되자 제3의 길([[미국]], [[프랑스]], [[이스라엘]]에서 재정착)을 고려했는데, 이스라엘 본토에서 1948년의 [[화폐개혁]]([[영국령 팔레스타인|팔레스타인 1파운드]]=[[이스라엘 파운드|이스라엘 1파운드]]) 직후에 이스라엘 파운드([[파운드 스털링|영국돈과]] [[등가교환]])로 지급하는 매우 비싼 [[봉급]]에 주목했다.[* 1948년 시점에서 [[이스라엘 파운드]]의 실질 가치는 파운드 블록에 힘입어 [[이스라엘 파운드|이스라엘 1파운드]]=[[파운드 스털링|영국 1파운드]]=[[미국 달러|미국 10달러]]=[[서독 마르크|서독 100마르크]]=[[동독 마르크|동독 100마르크]]였으니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Sterling_area|#]], 동서독 양국과 이스라엘 본토에서 공장 직공의 최초 [[일당]]은 1마르크~10마르크(동독과 서독) VS 1파운드~10파운드(이스라엘)의 구도를 형성했다. 그러나 스털링 잔고를 활용한[[http://sonnet.egloos.com/4059172|#]] [[통제경제]]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가 없는 형편이었고, 이스라엘 재무부와 이스라엘은행(이스라엘국의 [[중앙은행]])은 화폐정책을 변경하면서([[파운드 스털링]]과 등가교환→[[미국 달러]]와 등가교환→[[프랑스 프랑]]과 등가교환) 이스라엘 파운드의 안정화를 도모했다.[[https://blog.naver.com/moonjosh4/222242622821|#]] [[https://blog.naver.com/moonjosh4/222242616930|#]]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Anglo-American_loan|#]]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Austerity_in_Israel|#]]] 게다가 이스라엘로 탈출한 [[폴란드 제2공화국|전간기 폴란드]] 출신 폴란드계 유대인들 가운데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Yitzhak_Arad|이츠하크 아라드]]처럼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[[지그문트 바우만]]처럼 [[사회주의]] [[이상향]]에 심취하는 [[지식인]]들을 제외하고 당대의 선택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